해방 후의 북한 교회
1. 김일성 정권의 대두(소련의 점령정책과 북한정권의 수립)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가 임박한 가운데 미․영․불․소의 4대 연합국은 포츠담에서 회담(1945. 7. 17~8. 2)을 갖고 전후 유럽문제의 해결과 소련군의 대일 참전에 따르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 참가
신학부에서 자유로운 신학을 접하게 된다. 이어 미국 프린스턴과 웨스턴 신학교에서 유학하여 자신의 신학을 점차로 정립해 가기 시작한다. 민족주의 신학자로서 어려움과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학의 길에서 한국신학대학교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장로
신학의 전개로 꾸준히 한국기독교의 원형인 민족주의와 민중해방의 교회를 지켜왔고, 민중 신학과 그 교회는 민족의 자주와 통일에서 북의 동포와 대화할 신학적 자세가 되어 있다. 주체사상은 전통적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조선민족의 역사적 요청에 맞도록 창조적으로 적용한 민족적 사회주의이
조선민간에서는 아직도 영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오고 약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효능은 여성생리의 특효약으로 성욕이 북돋우므로 피부도 새로워지고 그렇게 되어 자식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쑥과 마늘은 인간의 열쇠를 갖는 성적신비를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둘 다 남녀가 사람됨에 없어서
신학술과 신사상을 소개하고, 국민의 국사(國史)와 국민성을 고취하고 개조 또는 부활한 민족으로서 신국민을 이끄는 데 노력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당시 그는 문화적 규범과 믿음을 갖지 못한 조선인들을 엄격한 도덕적, 정신적 개조를 통해 개조할 수 있다고 여겼다. 즉 정신생활이 거의 정지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