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에 따라 납속품직을 취득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3) 양반계층의 분화
임진왜란 이후 정부는 향촌사회 하부구조에까지 직접 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수령권에 대응하는 재향사족들의 자치기구였던 유향소는 더 이상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18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이
계곡을 막아 물을 가두어두는 저수지인 제언(堤堰)중십의 수리시설을 만들었다.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은 농사에 필수불가결한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적기부터 수리시설을 축조하는 데 주목하였다.
조선조 현종 3년 (1662) '진휼청제언사목'이라는 이른바 정책발표를 한 이래 조선전기(15세기 후
조선시대를 신분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바탕에서 양반, 양민, 천민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양반을 제외한 양인, 천민이 일단 민중에 속할 것이다. 양민의 범위도 다양하다. 중인, 이서(吏胥),무사(武士)와 의원, 화원(畵員) 그리고 광범위한 평민층이 여기에 속했다. 실제 특수직을 세습으로 누리
사회는 정착 농경생활권이나 어렵, 수렵 생활권 혹은 유목 생활권으로 정착지 주변의 환경에 적응하여 생활권을 형성하게 된다. 청동기의 발견과 발달로 인하여 각 생활권에 맞는 선진문화와 후진문화가 생겨나게 되고, 후진문화는 선진 문화에 영향 속에 흡수되게 된다. 그리고 계급이 분화되고 사회
재지사족(在地士族)이라 하였다. 향촌을 지배하던 세력이라고 하면 맞을 듯 하다.
사족은 한마디로 지방에 거주하는 양반세력으로 각 지역(향촌)에서 관(官)과 민(民)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비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1. 사족지배세력의 형성
16세기는 조선초기에 완성된 국가질서가 이완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