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도 예외가 아니여서 이러한 종교정책을 포함해서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모든 정책의 핵심에는 북한의 주석이자 위대하신 어버이 수령님이자 천하 만민이 우러러하면서도 지상 최대의 낙원의 장군님이신 김일성이 있다. 갑자기 김일성이라고 하니까 국가보안법에 걸려서 잡혀가는거
김일성의 아버지 직업과 어머니의 생활에 비추어 김일성이 어린 시절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라는 추측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종교적 영향은 받지 않았지만, 기독교신자들에게서 인간적으로 도움은 많이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유소년기에는 민족문
김일성연설은 한국전쟁의 책임모면을 위한 것이었다. 전쟁 실패 이후 전쟁에 대한 정치적 인책론이 제기돼 궁지에 몰릴 것을 예상한 김일성이 그 책임을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에 뒤집어 씌우고, 동시에 정적들인 연안파와 소련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행해진 연설에서 주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던
북한은 점차 중국을 편들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노동당 간부들은 중국공산당 출신이고, 또한 6.25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린 중국의 입장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64년부터 전면전으로 확대된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북한은 중국에 실망하였다.
대한김일성의 애정은 각별했을 것이며 이같은 가정환경이 김정일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한다.
김정일은 1949년 9월 평양 남산인민학교에 입학했고 다음해 6·25전쟁 발발로 만주로 피란 가 길림학원에서 공부했다. 1952년 11월에는 만주로 소개되어 온 만경대 혁명가 유자녀 학원(만경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