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들은 서민이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원래 관심이 있었던 분야는 발해 및 고구려 지역에 대한 연구였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신라 서민들이 중국을 오갔던 과정과 그곳에 정착해 살았던 신라인들의 삶을 살펴보려 한다.
우선 신라인들의 중국여행 과정 등을 통해 중국과의 교류 과정을 살펴보고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 가야의 김수로 신화를 보면 신비롭고 경이롭기 그지 없다, 우리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천손민손으로서 궁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하늘에 뜻에 신탁(神託)하여 순응하고 하늘의 섭리에 따른 참된 삶을 살려고 노력한 조상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구비문
신라로 발길을 되돌리는 원효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러면서 쓸쓸한 뒷모습을 보인 채 중국으로 향하는 의상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고독한 어깨위에는 결연한 의지가 있다. ‘그래 마음을 깨친 것은 그대이지 나는 아니다. 나는 초지일관, 학문의 완성을 도모하리라’ 그는 종남산
● 일군날(2.1)
- 농경시작에 앞서 일군들이 회식을 함&풍년을 기원
- 일군날의 의미가 왜곡된 것
18~19C 노비일(동국세시기) : 봉건적 느낌(소작농・노비에게 농사 잘 지으라고 챙겨줌)
일제시대 지배수단의 일환으로 이용
중국 화조날(2.1) - 왕실에서 사용
- 지방마다 떡을 해먹음
경기 : 송편
평
중국을 왕래하며 명성을 떨친 외교관이었다. 둘째형 허봉은 누구보다도 허균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허봉은 또한 허균에게 인생 처세에 있어 직접.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38세의 창창한 나이에 당쟁의 물결에 휩쓸려 요절하고 말았으니, 허균과 마찬가지로 소외의 삶을 살았다고 함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