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중주의 불교신라시대 당시에는 귀족주의 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당시의 승려들은 민중의 무지가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민중을 외면했다. 그러나 태종 무열왕 당시 등용된 원효는 불교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학승으로서 높이 평가
3. 삼국유사에 드러난 불교의 대중화
3.1. 승려들의 교화 활동
3.1.1. 혜공 (三國遺事, 二惠同塵)
- 釋惠空天眞公之家傭嫗之子小名憂助(석혜공천진공지가용구지자소명우조)
: 승려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였다.
- 常住一小寺(
(1)통일신라 전기 태종무열왕 ~ 경덕왕, 신라중대
의 불교
1)정치이념으로서의 불교의 역할 축소
불교계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불교의 정치이념으로서의 역할이 축소되었고, 그 대신에 개인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측면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시대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불교 공인과 태학(太學) 설립(372), 율령(律令) 반포(373) 등으로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이 구축되었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즉위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의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奈勿王)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중대는 무열왕계에 의해 왕위가 이어졌고, 하대에는 내물계 김씨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다.
반면 《삼국유사》에 의한 시대구분에서는 신라를 상고(1혁거세~22지증왕) · 중고(23법흥왕~28진덕여왕) · 하고(29무열왕~56경순왕)로 나누고 있다. 이것은 왕명의 변화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상고에서는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