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은 아버지의 자유, 담백함, 로맨틱한 면과 어머니의 강인함, 적극성을 닮아 전통에 도전하는 반항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여 8살 때 서유기, 봉신방 등 고전소설, 10대 때는 걸리버 여행기 등의 서구소설 탐독, 어려서부터 문학적 소질 보였다. 또한, 16살에는 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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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비교적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하던 정령은 1942년 공산당과 당 간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번에는 공산당에 의하여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농촌으로 보내졌다. 1949년 공산당의 승리 후에는 다시 도시로 돌아와 중선부문예처장(中宣部文藝處長), 중앙문학연구소장(中央文學硏究所長) 및
정령은 1930년 좌련에, 1932년에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 기관지인 『북두(北斗)』의 편집을 맡았다. 그러다가 국민당 기관원에 붙들려 3년 남짓 옥살이를 하고 1936년에 공산당 점령지구인 옌안(延安)으로 들어가 중국문예협회 주임, 해방일보(解放日報) 편집 등을 담당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
문학의 영향을 계승하고 있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작품과 같이 불교는 국문학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사상이 국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구체적인 형태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국문학의 장르별로 살펴보고 중국의 불교사상, 문학과 비교하여보자.
문학론』, 제이엔씨, 2009, p.242.
한국은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유교 ․ 불교 ․ 도교가 수입된 이래 이들이 전통 무와 더불어 공존을 연출해가는 구도인 다종교 공존의 특성을 보이는데, 이러한 특성이 가장 여실히 드러난 시대는 고려조였다. 조흥윤, 『巫와 민족문화』, 1990, p.14, 조흥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