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 두 나라 지식인의 새로운 체험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박향란, 투고논문 : 『열하일기(熱河日記)』필담(筆談)에 포착된 청조(淸朝) 지식인의 형상과 의미, 2009, 동방한문학회
박지원은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고 잠도 자지 않고 청나라 사람들을 만나며 “더 좋은 것이라면 배우자
청나라 사절로 북경에 갈 때 최말단의 신분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하여 다녀온 후 열하일기라는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전무후무한 명작 기행문을 쓰게 된다. 그 후 50세에 선공감 감역 등 말직에 머물다가 의금부도사, 한성부 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등의
청나라 황제의 하계별장이 있었던 열하를 여행한 중국여행기이다.
1) 도강록(渡江綠) : 박지원이 여정을 시작하면서의 마음가짐과 준비 자세를 엿볼 수 있으며 처음 접하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이 나타남.
2) 성경잡지(盛京雜識) : 수레, 우물을 다루면서 조선의 사회를 경제
했다. 그는 중국사행을 따라 나섰던 당시의 대부분의 문사들처럼 관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사의 중심지에서 천하의 대세를 가늠하고 청의 발달한 문물 속에서 조선의 낙후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새가려는 큰 뜻을 품고 사행에 참여하여 그 성과로 열하일기라는 大著를 남겼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출판사, 2003,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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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당시의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관념과 형이상이학적인 문화에 빠져 청나라의 자연과학 방면의 기술을 배우지 못하였고 조선의 낙후한 정세를 바로 잡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일신수필 박지원, 『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