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
ㄴ. 3사의 언론관직을 차지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
ㄷ. 사화에 의해 사림 대부분이 제거됨
ㄹ. 중종이 훈구파 견제를 위하여 다시 등용-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정계에서 밀려남.
훈구파들의 견제가 있게되고 결국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사림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폭압을 일삼던 연산군이 축출되는 1506년의 중종반정은 사림파에게도 새로운 정치적 진출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써 엉겁결에 남의 등에 업혀 군주가 된 중종은, 아무런
조광조 등장의 시대적 배경
1506년(연산군 12) 년에 성희안과 박원종은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에게 도움 을 청하여 호응을 얻어서 반정에 성공하여 대비(大妃: 成宗의 繼妃)의 윤허를 받아 연산 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 사건이 중종반정인 것이다
반정으로
조광조(1482~1591)가 살았던 시대는 연산군의 실정으로 피폐해 진 민심이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계속되어 조정이 불안했던 때인 데에다가 이와 겹쳐 위정자들의 사리사욕이 그치지 않았다. 연산군 때부터 계속 된 과다한 공물의 충당으로 고통 받던 백성의 상황은 중종반정 후 10년이 지나도록 나아질
중종 5)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의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