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왔다. 그 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
그러면서 해방과 동시에 잠적했던 친일파들은 다시 정치·경제의 중심부로 돌아왔다.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구성으로 처단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지만, 반민특위 습격사건과 국회프락치 사건을 거치면서 반민특위가 사실상 해체되었고, 이후 친일파에 대한 처단은 흐지부
지배적인 요인이었으나, 근대국가와 정부의 강권주의 체계가 성립하면서부터 그 역할이 위축 또는 약화되었던 반면 지배와 억압을 야기하는 경쟁 혹은 투쟁이 보다 확산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경쟁과 상호부조의 논리는 신채호에게 있어서는 세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주었다. 첫째, 아의 단
논리를 깨트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역사학은 조국이 식민지라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히 민족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결과 대체적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의 뛰어난 문화유산이나 역사적 전쟁 및 우리 역사에 나타난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