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지위를 강화해왔고, 국민들에게는 친일파 문제나 그 이후 여러 가지 큰 정치·경제·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그렇고 그런 것 아니냐...'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친일파의 형성과정, 일제시기의 행동양태, 해방후재등장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시기에 판·검사로 근무한자는 판·검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여, 친일파의 정치·경제·사회적 규제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연감》, 1949년판, pp.1~12.
또한 1948년 9월 10일 최고인민위원회의 주석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제의 규제, 간섭에 의해 이들 작품은 <<염군>>을 통해 발표되지는 못했다.
PASKYULA는 염군사보다 그 발족이 조금 뒤 늦었다. 이익상이나 김형원(金炯元)은 1920년대 초두부터 명백하게 경향적 색채를 띤 시와 소설을 발표했다. 또한 김복진(金復鎭)과 연학년(延鶴年) 등은 그 이전에 계급주의를 지향한
해방후에는 농민 문제도 급격히 부각되기 시작했다. 인민위원회는 3,7제 주장( 소작료 30%납부)하였고, 미군정은 3,1제를 주장(수확물 1/3을 지주 몫으로)하였다. 이에 소작농들은 어느 쪽의 개혁이든 대환영하였고 경자유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토지개혁문제가 친일파 청산과 함께 중요 문제
친일파로 만들고 이들을 '합방'과정에서 적절히 이용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되는데 는 갑신정변과 청일전쟁이 큰 작용을 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 후로 친일파는 대규모화하였고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친일파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식민지 통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