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나말여초의 왕조교체기에 있어서 정치 사회적 변동을 주도한 세력은 주지하던 바와 같이 호족이었다. 신라 하대에 중앙 진골귀족들의 상쟁으로 정치활동이 약화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되자, 토착적인 촌주층의 성장이 두드러지고, 또 지방으로 밀려난 중앙귀족 출신자나 군진세
진골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려 한 조치로 보인다. 내성사신(內省私臣)이자 대장군인 이찬 김용춘에게 정사를 위임할 만도 하지만 그는 아직 오십대로 다른 원로 귀족들에 비해 권력 핵심부 내에서의 정치적 지도력에 한계가 있을 수 있고, 또한 여왕의 왕위계승이 문제되던 시점에서 왕의 친척인 용춘
1. 목적
진지왕이 폐위되고 진평왕이 즉위하는 과정은 상당한 정치적 변화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진평왕대 초기의 정치상황을 알려 줄만한 正史의 자료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 연구에서는 삼국유사소재의 「도화녀· 비형랑」조를 분석하여 진평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가 별개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듯한데, 법흥왕(514~540)때에 이 두 계통이 하나의 체계로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골품제도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이라는 두 개의 골(骨)과 육두품(六頭品)으로부터 일두품(一頭品)에 이르는 6개의 두품(頭品)을 포함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