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되었다. 즉 후삼국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은 지방 호족세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는 후고려의 기반을 계승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Ⅱ. 나말여초의 변혁을 주도한 6두품과 호족
1. 육두품
신라에는 골품제라고 불리우는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가 있었다.
사회의 근간이었던 골품제의 붕괴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진골귀족들의 자체분열 뿐만 아니라 왕이나 귀족들의 생활 역시 사치스럽고 방탕하였다. 진성여왕은 궁중에서 미소년들과 놀아나면서 간신들이 정사를 좌우하게 하였고 그 뒤를 이은 효공왕은 천첩에 매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신
사회에서 육두품은 그 지위가 성골·진골보다 하위계층이긴 했으나, 본질적으로는 중앙귀족의 한 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 하대로 가면서 이들은 점점 정치적 ‘타자’가 되기에 이르렀고, 그에 따라 한문학 글쓰기를 통해 문학 재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이때 육두품 문인들은 자신의 처세와
사회적 위상을 확립하며 양적성장을 이룬 선종을 주목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화엄종으로 대표되는 교종과 이에 대비되는 종교 세력인 선종과의 차별상과 더불어 진골 귀족과 지방호족의 차별상을 나란히 놓고 해석함으로써 나말여초의 시대변동을 이해하는 주요한 틀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80년대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