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조숙하고 총명한데다 영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언행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호기심이 많아 지난날의 정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기존 질서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탕평책에 따라 다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남인과 노론 명분 속에 미약한 권력을 유지하여 온
사도세자’
<한중록(恨中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18세기의 조선 왕실의 계보와 당파 싸움에 대해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조선 중기의 관료는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 북인(北人)등의 네 당파로 갈려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계기로 번갈아 가며 권력을 잡았
사림정치시대
사림세력의 끊임없는 당쟁은 일제 치하 식민지 시절, 일본의 대 조선 식민통치를 정당화시켜주는 역사적 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당시 식민사관과 일제 어용학자들은 조선은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논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조선 당쟁의
기반 확충에 기여한 많은 관료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정조시대 재상을 역임하며 많은 변화를 이끌어낸 채제공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당시의 상황과 그의 활동을 통한 역할을 생각하며, 당시 사회의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이 무엇이었는가를 채제공이라는 거울을 통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비극을 격어야 했다.아버지의 죽음을 당쟁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이해한 정조는 신하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강력한 왕권을 꿈꾸었다.노론이 지배하던 정권 구도를 남인이나 소론 인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고,신진 학자들을 왕실에 두어 왕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