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해서 화궈펑[華國鋒]은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은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에는 베이징정변으로 4인방이 체포되는 등의 격동의 시기를 체험하였으나,
이러한 와중에서 비마오쩌둥화(化)가 진행되어, 1978년 11월에는 천안문사건이 혁명적 행동이었다는 대역전의 평가
중국 전역과 전세계에 충격을 준 ‘제1차 천안문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2. 1차사건 재평가이후 추진한 개혁개방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래 첫 번째로 천안문광장이 피로 물든 1976년 4월 5일, 수백 명의 시위자들은 피를 흘리면서 트럭에 실려갔다. 광장은 선혈이 낭자했고, 끌려가는 사람들은 얼
, 9시경에 이르러서는 광장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잠시 후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자금성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1만여 명의 노동자 민병, 공안, 인민해방군은 일제히 출동하여 군중들은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다. 당시 중국 전역과 전세계에 충격을 준 ‘제1차 천안문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월20일 중국공산당이 “학생들의 시위가 법률의 허용범위를 넘었다”고 경고
-4월22일 추도대회에 20여만 명의 학생, 시민참여
-자오쯔양(온건), 리펑(강경)의 의견이 엇갈리고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원로 지도부도 동요,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당과 국가의 초기 대응에 혼선(시위사태 장기화, 확대
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 발생하였으며,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 가량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정식 발표하였다.
천안문사태의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내 개혁파들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