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이 논문은 당장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의 지침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평화의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
프로이센은 후발산업국가로 급성장하며 일급국가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칸트가 청년기에 왕은 프리드리히 1세였는데 가부장적인 정치체제 아래 풍부한 자원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신수설을 유지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더 이상 가부장제로 몰고 가려 하지 않았으며 문화정책을 추구했다.
고장에서 100리 밖에도 나가지 않고 평생을 서재에서만 조용히 살았다. 특히 그는 규칙적인 일상 생활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계와도 같이 철저한 규칙 생활을 하였다.
그의 책으로는 국제 연맹 사상의 기원이 된〈영구평화론〉〈도덕의 형이상학적 기초〉
칸트의 평화사상은 루소 이전에 세계정부론을 제안하였던 단테, 전쟁을 인간의 광란으로 보고 군주, 성직자, 지식인등 지도자들에게 평화를 호소하였던 에라스무스, 군주의 이성에 의한 유럽의 영구적 평화를 주장하였던 생피에르 그리고 루소로 이어지는 근대 평화론의 사상적 연장선위에 있다고 볼
철학, 수학, 자연과학을 폭넓게 공부했는데 여기서 뉴턴의 물리학을 접하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계를 위해 근교의 세 가정을 전전하며 가정교사 생활을 하였다. 31세에 통과한 논문으로 사강사가 되어 여러 과목을 가르쳤는데 교수 자리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1764년(40)에 시학 교수 자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