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논란이 되는 6가지 주제를 선택하였다. 대립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두 책을 비교분석하면서 즉위 이후 수많은 기로에 섰던 광해군의 선택을 되짚어보고자 했다.
2. 본론
1) 형제를 죽인 왕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군주]에서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들 영
2. 연산군과 광해군에 대한 기존의 평가
연산군과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엄연히 ‘일기’(폐위된 왕의 실록은 ‘일기’라 칭한다.)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히 야사에 나오는 내용들이 사실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한국역사(전25권) 13권 연산군 편에는 아예 야사의 내용들로 연
광해군이 남긴 치명적인 오점이라 할 수 있다.
대외정책 분야에서는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선택하였다. 광해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실리외교로 조선이 전란을 겪지 않았다는 주장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리적인 우위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는 역대 유목 민족들의 침략을 많이 받아
1)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자는 시백, 호는 석파이다. 그는 순조 20년(1820) 남연군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12살에 어머니를 잃고 17살에 아버지를 잃은 후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적막한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는 21세 되던 헌종 7년(1841)흥선정이 되고 2년 후에는 흥선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헌종 12년(1846)
탁월한 감각으로 외교정책을 펼친군주임에도 불구하고 폐주로 기록-인식되어야 했던 광해군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 광해군은 결론적으로 결국은 실패한 왕이었고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삶은 극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광해군의 삶을 비극적으로 몰아간 17세기의 초반은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