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 합당한 것인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 경건의 진정한 의미는 모른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거나 세상 속에 파묻혀서 아예 인식조차 하지 않는 양면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적 존재인 인간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Ⅰ. 내게 다가오신 예수님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예수님에 대한 설레임이나 기대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단지 성경에 기록된 나를 구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 그것이 내 마음에 심금을 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평범하게 교회학교에서 배워왔던 예수님으로 기억이 날 뿐이다.
토마스는 주변 세계보다는 자신의 세계에 더 관심을 두었다. 객관적, 사변적 사유보다는 내면적, 체험적 종교가 그의 일대 실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외적인 요소에 아예 무지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세상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으며, 그 문제 해결을 예수 그리스도에
본문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나서
책제목에서도 끌렸고 내용도 단락이 나눠져 있어서, 쉽게쉽게 읽어내려 갔던 것 같다.
현재 한국의 교회에 기독교인은 많지만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가며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아니다. 신학이 유에 해당한다면, 법신학은 그것의 특별한 하나의 종에 불과 한 것은 아니다. 신학이란 항상 그 어떤 형식에서도 신의 현존재의 근본문제가 포괄적인 것으로 이름 붙인 것을 문제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법신학은 신학의 특수한 분야에 속하기 때문에 신학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