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키라는 코린토스전을 무사히 치르고 아테네 선단도 케르키라에서 귀로에 올랐다. 아테네가 코린토스의 조약국이면서 케르키라와 손을 잡고 코린토스에 해전을 도발한 것이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첫 번째 원인이 되었다. 그 이후 아테네 인과 펠로폰네소스인은 전쟁으로 몰아넣은 분쟁이 일었났다
아테네 선단도 케르키라에서 귀로에 올랐다. 아테네가 코린토스
의 조약국이면서 케르키라와 손을 잡고 코린토스에 해전을 도발한 것이 이 댖전의 첫째 원인이 되었다. 그 이후 아테네인과 펠레폰네소스인을 전쟁으로 몰아 넣은 분쟁이 일어 났다. 즉 코린토스인이 아테네인에게 보복할 목적으로
소스전쟁을 통해 투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펠로폰네소스전쟁이전 겨우 반세기 전만 해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그리스인을 단결시켜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해 싸워 이겼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육군과 해군을 유럽에서 몰아내어 자신들의 독립을
투키디데스는 소환당해 재판을 받고, 추방을 선고받았다. 투키디데스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이 추방령 덕분에 〈전쟁사〉집필에 전념할 수 있었고, 특히 펠로폰네소스 쪽(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을 널리 여행하면서 좀더 많은 정보에 접할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 살아남았다.
아테네인들은 데모스테네스의 선동에 영향받아 지원을 결의하는 표결을 했다. 14일 만에 알렉산더는 일리리아의 펠리온(지금의 알바니아 코르처 근처)에서 테베까지 386㎞를 행군했다. 테베인들이 항복하지 않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입성해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신전들과 핀다로스의 집만 남겨두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