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 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
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
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4.
1.2 1930년대의 서울
1930년도를 전후한 시대의 서울은 19세기의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 비교할 수는 없었으나, 명치유신 이후 급격히 성장한 일제가 실시한 한국 내 시장 확대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도시화 정책으로 외형상으로나마 근대도시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 바깥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중국작가라고 하면 중국 내에서도 20세기 내내 중국 문학의 강력한 중심으로 작용해온 루쉰이라고 할 수 있다. 루쉰은 뛰어난 문학가이자, 위대한 사상가, 교육자로서도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다. 루쉰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살다간 고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