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감사에게 뇌물로 쓰고 스님들을 쫓아 버린 후 가야사를 폐사시킨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이하에서는 대원군에 대한 지식들을 정리해 보고, 그의 업적과 실정들을 되짚어 보며, 특히 논란이 되는 그의 "쇄국정책"에 대한 의견들을 종합해본 후 이를 토대로 그에 대한평가를 내려보기로 한다.
한국사회에 대한 역사의 왜곡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줌으로서 한국의 근대사를 보는 시각을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명성황후 역시 그러한 왜곡의 중심에 있다고 전제하고 그녀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살펴보고 재해석해봄으로써 이러한 연구의 흐름에
한국근대사의 교훈
조선 사회는 안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 근대적인 요소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채 제국주의 열강에 개항을 하였다. 이로부터 열강의 침략이 잇달았으며 청.일전쟁 러.일 전쟁을 도발한 일제에 의하여 대한 제국은 붕괴되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우
평가는 한철호의 「개화·일제강점기 김옥균에 대한역사적평가」(2004)의 pp.55~56를 참조하였다.
4. 북한학계에서의 김옥균 연구와 평가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된 이후 북한의 근대사 연구는 모두 사적 유물론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 해방이후 북한학계에서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서술한 최초의
평가에서부터, 개
화의 선각자이자 반일의 기수였다는 최근의 긍정적인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명성황후를 이해하는 것은 곧 한국근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다룬 역사소설들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