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일 의도는 없었지만 때려 죽인경우인 투구살의 경우에는 반드시 사건을 조사하여 징계를 내려야 한다. 권연웅, 앞의 글, 168쪽
물론 치걸의 사건의 경우 고의살이 아니기 때문에(다툰 뒤 6일 후에 죽음) 사형은 면하는 판결을 내렸을 것이고 정조가 내린 원지 정배 정도의 처벌을 판결했을 것이다.
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
법을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④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태학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⑤ 동천왕 때 위와 국경을 접하게 되어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위장 관구검의 침입으로 국내성이 한 때 함락되었다.
13.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연방제안이 공통점이
다산정약용이다. 그는 문학, 철학,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에 못지않게 교육의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공적을 남겼다. 여기서는 이러한 다산의 생애와 실학의 거구(巨軀)라 할 수 있는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대해 본론에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1. 실학사상에 나타난
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민족적 가치 창출을 해 나가는 것이 모범적 공직 수행의 자세이다. 따라서 공직자 자신의 행동이 역사 속에서 조명되고 공직자의 행적 자체가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남는다. 다산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이러한 공직과 공직자 상에 대 해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