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명명한 '화성'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아마 수원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화성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정조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역을 천하명당 자리인 현륭원 자리로 옮기고 고려시대부터 터를 잡아왔던 부읍치를 옮겨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하려
수원부를 둘러 싼 성벽은 팔달산 정상에서 산의 능선을 따라 남으로 이어 내려와서 남쪽 평탄한 곳에 내를 지나 동쪽으로 낮은 언덕을 따라 거의 직선을 그리다가 동쪽 끝 높은 지점에서 지세를 쫓아 서쪽으로 굴곡을 그리다가 북쪽 내를 건너 평탄한 들을 지나 다시 팔달산 정산으로 이어진다. 산성과
2) 왜 탕평정치를 추구했나
...협소한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색목으로서 사람을 버리겠는가?... 정조 2권, 즉위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9월 22일(경인) 1번째기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마치 스스로 충신, 역적의 의리의 사이에서 보존하지 못할까봐 당초부터 감히 쉽사리 말하지 않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 붕당정치의 역사이다. 선조 대부터 시작된 붕당정치는 영, 정조 대에 들어서는 그 분파가 다양하게 세분화된다. 사림 정치의 역사는 정조시대 정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배경이 되기 때문에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정조
숙종은 자신의 두 여자를 매개로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기용하며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두 세력: 남인을 대표하는 장희빈,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황후)
☞ ↑ 위 내용 관련 자료「살아있는 한국사」. 이덕일. p.184~210
■ 경신환국 - 남인인 허적이 궁중의 기름천막을 쓴 것을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