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나뉘는 노론의 이분법적인 붕당관 때문에 인재가 버려지는 경우가 생기고 극심한 당쟁으로 인해서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풍토가 생기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때문에 정조는 정치의 표준을 바로 세우는 한편 두루 포섭하고 공평하게 등용하는 탕평의 이념을 자신
세조 때 역대 군주의 글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
정조는 규장각의 기능을 학문 연구 기관으로 확대
당색을 초월하여 학식이 높은 사람을 모아 우대
자신의 친위세력을 형성하면서 기존의 집권층 내부에서 인재를 골라 흡수하는 전략을 썼음
대표적인 학자로는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 본 론
정 조 와 노 론
정조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왕도정치의 구현이었다. 불과 11살 무렵, 노론(老論)에 의해 아버지(사도세자)가 죽는 것을 지켜 보아야 했던 정조이기에, 노론의 전횡에 휘둘려지는 조선을 다시 왕에 의해 다스려지는 왕의 나라로 되돌려 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는
대표하는 인현황후)
☞ ↑ 위 내용 관련 자료「살아있는 한국사」. 이덕일. p.184~210
■ 경신환국 - 남인인 허적이 궁중의 기름천막을 쓴 것을 이유로 하여 남인을 축출, 서인등용 이때 남인의 처벌을 두고 남인을 처벌하려는 송시열의 노론과 남인과 화해하려는 윤중의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온건 소론과, 경종을 왕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던 강경 노론이었다.
노론의 세력이 주가 되었던 시기에 자신을 보호해줄 세력 없이 경종은 왕위에 등극했다. 그리고 곧 노론의 압력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고, 이듬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주청하는 노론의 요구에 이마저도 들어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