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시대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상대적인 것이었다. 군부정권에 맞선 그들의 투쟁은 도덕적인 정통성을 낳았다. 하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미래는 ‘올바로 발전된 통일국가’였다. 그들의 ‘저항’이란 발전과정의 불합리성, 좁게 보면 발전주체의 자격문제를 따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정치자금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정치자금을 야당 의원들에게 일정부분 나누어 주면서 의원들을 매수하거나 통제했고 이는 야당 정치인들 사이의 불신과 반목을 깊게 했다. 박정희정권기 야당가에서 발생했던 사쿠라 파동 등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경제 성장은 위기를 맞아 정책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 1970년대 중반부터 중화학 공업 제품의 비중은 전체 제조업 분야와 수출 상품 구성에서 큰 비중을 차지
★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석유 위기가 발생하여 세계 경제가 침체되면서외국 자본과 대외 무역에 의존하던 한국경제는 위기를 맞았다
박정희에게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적절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박정희는 당시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바리새 노인들에게 한 말을 생각해본다. 군사혁명은 결코 민주주의의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 민주주의의 구명작업이요 병든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