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이러한 내적인 힘에 의한 자생적인 공업화의 길을 좌절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휴전 성립 후 경제의 회복력도 공업화의 새로운 동인으로서 정부에 의한 선택적 중점 투자도 있었지만 이러한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업화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다. 따라서 이 50년대의 공업화
경제부문의 당면과제는 식민지시대의 경제적 유제를 민주적 방향으로 전환하여 자립경제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발생한 1950년대경제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방 후 도입된 원조 , 특히 한국전쟁 종료 후 도입된 원조는 한국자본주의의 내용과 형태를 근본적으로 규
자본조달과 배분을 위해 금융시장을 철저하게 정부 통제 하에 두게 되었다.
경제성장의 인프라로 도로, 철도, 건설, 전력시설과 같은 것도 정부 주도로 자금을 몰아 주어 확충해 갔다. 1962년 울산공업단지를 만들었는데 정부가 땅을 고르고 산업단지를 만들어 기업들에게 싼 값에 분양하고 상하수도와
자본주의적 경제질서와 봉건적·전통적 지배 질서가 혼재되어 있었다. 넷째, 이러한 반(半)봉건적이고 관헌적인 국가 질서에 부르주아 계급이 굴복한 상황은 독일의 시민혁명을 지연시키거나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박호성, 2005: 67). 따라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이 식민지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휴전을 제의하였고 7월 10일 비국의 동의로 휴전 예비 회담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문제로 회담이 중단 상태로 있다가 미국의 정권교체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 후 회담이 재개되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을 반대하였으나 미국은 경제원조 등을 약속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