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신학교 졸업 이 해에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된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는 폐교를 당하고 손양원목사는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아 보게 된다.
4. 만남의 축복을 통한 영향
손양원 목사가 있기까지 주위에 많은 인물이 있겠으나 그 첫 번째를 꼽는다면 아버지 손종일 장로이고, 일본의 나카다 목
평양에 신학교가 서면서 그 뜻은 무너졌다. 그렇기는 하나 1914년 동교 내에서 고고의 소리를 발한 [조선기독교대학]은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여 그 계획은 한 부분은 실현되었다. 언더우드목사의 고아원 시작은 한국에서의 고아사업의 처음이 되었다. 교육하는 일은 언더우드목사가 직접 하였고
교육은 래디칼하였다. 마치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의 출장소와 같았다고 하였다. 그런 그가 메이쳔 밑에서 배우자니 양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갔던 학교는 웨스턴 신학교였다. 당시에 그 학교는 프린스톤과 같은 계열의 학교였지만 폭이 더 넓었다. 1932년 겨울 그는 귀국을 하여 1936년 동안 평양
평양 숭실 전문학교에서 시작된 것이며 당시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은 그가 신학사 신학석사를 마친 1923년에서 1926년 사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구체적으로 비롯되었다.
1936년 이후의 신근본주의 운동에서는 분리의 교리를 주장할 뿐 아니라 1차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이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呂運亨訊問調書」, p.398
김규식이 파리로 파견되기 위한 자금은 김규식 자금 2천원, 장덕수 3천원, 여운형이 3천원 등으로 책정 되었다. 당시 이 자금은 소 100마리 정도 살 수 있었던 자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