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이 독창적이지 못하며 중국에 의지를 하였으며, 친제가 아니라 집현전 학사들과 상의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적에는 친제, 어제라 명확히 되어 있는데도 의구심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우선 국민적, 역사적 대사업인 문자창제가 과연 일왕의 힘으로 창제 될 수 있는가
문자 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있어서 그 기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의문은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기원설에는 ‘고전기원설, 범자기원설, 파스파문자 기원설, 신대문자 기원설, 가림토문자 기원설, 히브리문자 기원설,
훈민정음 창제와 무관할 수 없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과 최만리의 상소, 그리고 이에 관한 세종의 힐문 속에는 이두와 훈민정음이 대비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 문자사의 맥락을 뚜렷이 보여 준 것이다.
Ⅱ. 한글 맞춤법
한글로 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을 규정하는 한
중국에 의지하고서 스스로 '작은 중국'임을 자랑으로 삼을 만큼 자기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당시로서는 이러한 자아에 대한 강한 자각은 여간 귀한 일이 아니다. 한글은 그의 이러한 민족주의적 자아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세종에 반대한 최만리 등은 상소를 통해 훈민정음의 창제는 중화주
문자로의 의사표현도 바라게 되어 농민으로 하여금 소외된 ‘문자 생활권으로의 진입’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세적 지배질서의 재확립을 위해서라도 백성을 지배계급의 입맛대로 '훈민(訓民)'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래서 '정음(正音)'을 만들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든 초기에 언문삼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