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안정복의 역사인식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주자학을 신봉하던 유가 계에 새로운 변화와 반성이 일어나가 시작했다. 이것은 조선후기 국내외의 여러 사정, 즉 임진왜란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파탄과 국민생활의 피폐,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관리들의 고식적인 대응책에 대한 반발로 현실
I. 연구동향
1. 일제강점기 일본측의 연구성향
일제강점기 일제의 어용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임진왜란사의 연구는 대부분 대체로 정치사와 관련된 것이거나 전투사에 치우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연구분야와 주제도 크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일본인의 우월성을 과장 선전하고 조선인의
해방 이후 연구자들에 의해 규정된 용어라는 점을 들었고 둘째, 당시 받아들여졌던 ‘개화사상’이 하나의 사상이 되기에는 창조성과 논리성이 부족한 점을 들었다. 주진오, 19세기 후반 문명개화론의 형성과 전개, 『서구문화의 수용과 근대개혁』, 태학사, 2004. 33쪽.
따라서 ‘개화사상’이란 하나의
. 친일의 문제가 대중의 이야기로 되면서 구조적인 문제보다는 윤리성의 문제가 더 부각된 것이 일반의 현상이다. 해방 정국에서 ‘친일파’ ‘친일분자’ ‘매국노’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라는 말은 거의 매일 언론지면을 장식하거나 각 사회단체의 강령과 성명서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海防 보다는 陸防 에 비중을 훨씬 많이 두고, 바다 쪽은 거의 무관심하다싶을 정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중국에서 ㆍ海賊의 發生 原因은 무엇이었는지? ㆍ그들의 規模 및 組織, 活動과 네트워크 는 어떠했는지? ㆍ그들의 成長에 대한 淸朝의 反應은 어떠했고, 청조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ㆍ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