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뇌가와 거의 같은 형식을 갖추고 있어 주목되나 후대의 국문표기만 전함.
4. 고려전기향가의 문학사적 위치
고려인으로서의 임무를 자각 신라와는 다른 고려의 통치 질서를 수립에 관여
향가계승
향가를 지은 이유를 역사의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 졌어도 고려전기의 사회와 문화가 신라
향가가 아울러 존재했던 신라 문학의 이원성은 고려에 와서도 그대로 유지되어서, 한시를 통해 중세적 보편주의를 구현하는 한편, 향가를 지어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고려에 이르러서는 이원성이 명확하게 의식되었던 점이 신라의 경우와는 다르다. 고려의 향가 또는 그 잔존형태는
균여는 광종의 신임을 얻어 귀법사를 관장하고 많은 경전을 연구하는 일을 하게된다.
2. 균여의 신분과 업적
균여는 신라사람으로 망국을 경험하지 않았음으로, 신흥하는 나라 고려에서 자기의 사명을 찾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출가해서 승려가 된 다음에는 화엄종을 택해 고려전기의 사상
신라는 영토와 주민을 보존하기 어려운 처지로 떨어지고, 전국이 군웅할거의 터전이 되었다.
- 반락세력 중 견훤과 궁예가 각기 백제와 고구려를 재흥한다고 나서 후삼국 시대 시작
- 신라가 상당기간 존속한 이유는 문화의 무게 때문이었다.
- 신라 육두품 출신 문인들이 신흥하는 세력을 찾아 한
향가가 된다는 등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현전 향가를 수록하고 있는 삼국유사가 고려때인 13세기에 완성된 점, 그리고 향가 작품들 가운데는 문자로 지어졌다기보다는 노래로 부른 민요적 성격이 강한 것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향가라는 양식은 노래로 창작되어 가창되고 전승되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