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적 상황
허균은 16세기 말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살았다. 이때는 조선조가 중기로 접어든 때였다. 조선조가 세워진 뒤로 중기까지에는 태종과 세종의 손에서 내정의 바탕이 굳게 다져졌고, 또 왜구와 북방 민족의 침입이 크지 않아서 나라의 기틀이 튼튼해졌으므로 비교적 태평스러운 세월이
다시 세상으로 내려 보내고 남궁두는 세상에 내려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 이후 그는 용담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살면서 황정(黃精)과 솔잎만 먹어 몸이 건강하고 늙지 않았는데 허균이 부안에 있을 때에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용담으로 떠났다.
허균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혁명을 주장했다가(사실인지, 누명을 썼는지는 불분명함) 역적으로 처형을 당했다는 표피적인 사실만을 알고 있지 않은가? 혹은 최고의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의 동생으로만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당대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유
허균 등에 의해서 소단(騷壇)의 중심을 완전히 당시풍으로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보아,16세기는 당시풍이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니 바로 당시풍이 발흥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에 당시풍이 발흥했다면 그 주도적인 세력을 누구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16세기 당시풍
이첨1의 후손이다. 손곡산인전의 저자 이달의 외모는 우아하지 않고 성품 또한 호탕하여 절제하질 않았다. 또한 세속의 예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 때문에 시류에 어긋났었다. 잘 고금의 이야기를 말했고 산수의 아름다운 경치에 이르면 술 마시기를 좋아했으며 진 나라 사람 왕희지의 글처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