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숙과 베이징으로 석 달 정도 사랑의 도피여행(1918)을 떠났다. 어려서 천애고아로 자라온 춘원은 애정결핍증 소년이 지닌 민감성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썼는데, 베이징에서 뜻밖에도 단재 신채호를 만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신이 문제아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나는 상하이에 온 후로 작년(1919) 9월부터 대단히 자포자기한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술을 먹고 기생집에도 다녔습니다."
이 무렵 임시정부의 홍보로 ≪독립신문≫을 펴내는 일을 맡았던 춘원은 도산 안창호와 긴밀한 사제적·동지적·육친적
허영숙의 상해 방문 직후였기에 여자냐 임시정부냐, 사랑이냐 민족이냐의 갈림길에서 여자와 사랑 쪽을 택했다는 비난과 조소에 춘원은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3』, 한길사, 1986, 713쪽.
김윤식은 이광수가 ‘사랑’을 선택한 것에 대해 “사랑문제도 민족운동도 글짓
허영숙과 중국으로 애정 도피.
1919년 (28세) -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를 기초. 독립신문 사장겸 편집국장에 취임.
1921년 (30세) - 허영숙과 결혼.
1922년 (31세) - <민족개조론>을 [개벽]에 발표
1932년 (41세) - <흙>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4년 (43세) - 아들 봉근 사망
1937년 (46세) - 동우회 문제로 서대문 형무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 간호로 위기에서 소생하였다. 전통적인 부조중심의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 · 〈자녀중심론〉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북경으로 애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