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신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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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광수의 신문소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20~30년대 신문소설이 대유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에서 굳이 ‘이광수의 신문소설’이라고 소제목을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먼저 이광수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으로 읽힌다.
이광수는 1919년 1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2월에 상해로 가, 그해 8월에는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한다. 이렇게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는 1921년 돌연 귀국한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지금까지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것이었다. 적어도 ‘민족지사로서의 이광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겐 그러했을 것이다. 당시 이광수의 갑작스러운 귀국이 얼마나 뜨거운 감자였는지는 『이광수와 그의 시대 3』을 보면 알 수 있다.
임시정부의 대변인이자 『독립신문』의 사장이며 「무정」과 「신생활론」의 필자 이광수의 귀국은 3·1운동의 중진급 지도층이 아직도 옥중에 있는 때인 만큼 한국 지식층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송진우·현상윤은 감옥에서 나왔으나(1920.10.30), 육당은 아직도 가출옥(1921.10.18) 전이었다. 더구나 춘원이 체포되지도 않은 자유로운 몸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의 의혹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변절자 춘원’이라는 소문이 날 만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허영숙의 상해 방문 직후였기에 여자냐 임시정부냐, 사랑이냐 민족이냐의 갈림길에서 여자와 사랑 쪽을 택했다는 비난과 조소에 춘원은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3』, 한길사, 1986, 713쪽.
김윤식은 이광수가 ‘사랑’을 선택한 것에 대해 “사랑문제도 민족운동도 글짓는 일도 자기 삶의 실천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 즉, 민족보다 사랑을 우선시한 춘원을 비난하는 측은 춘원을 일개 개인이 아닌 “공적인 지도자”로 여겼기 때문이지만 춘원 개인에게 허영숙이란 존재는 민족운동과 등가를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인으로서의 활동이란 어디까지나 공적인 것에 가치척도를 두는 것이기에 사생활적인 것 내지 자서전적인 것은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다.” 1922~1932년까지가 춘원이 공인으로서 한 활동의 절정으로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춘원의 사생활을 개인사적인 일로 여기지 않고 비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위의 책, 714~716쪽 정리.
이렇듯 이광수는 귀국 직후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비난의 열기를 더욱 부추긴 것은 1922년 5월 『개벽』지에 발표한 논문 「민족개조론」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이광수는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어려웠고 창작여건도 마련할 수 없었다. 1921년 7월 『개벽』지에 발표한 「중추계급과 사회」는 ‘노아자(魯啞子)’란 필명으로, 1923년 2월 에 연재한 「가실」은 ‘Y생’으로, 같은 해 3월 『개벽』에 발표한 「거룩한 죽음」은 ‘장백’이란 호로 발표하였다.
이때 손을 내민 사람이 당시 의 사장인 송진우와 김성수이다. 이들은 모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동문이다. 이광수는 일본 유학을 통해 중요한 사람들을 만난다. 이광수를 흔들어 놓은 허영숙을 만난 것도 유학시절이고(1917년 유학생회에서 알게 됨) ‘문명’에 눈을 뜬 것도 이 때이다. 이광수의 일본 유학과 인맥은 다음과 같다.
이광수는 1905년, 당시 동학의 일진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처음으로 도일(渡日)한다. 1906년 3월 대성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홍명희와 같은 반이 된다. 그러나 그 해 12월 천도교와 일진회의 내분 동학의 제3대 교주 손병희는 뒷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러일전쟁 당시 승전 가능성이 높은 일본을 지원한다. 그는 러일전쟁이 터진 1904년 봄에 동경으로 갔으며, 이때 일본 국방부에 1만원을 기증한다. 일본을 도운 이유는, 당시 여러 정황으로 전승국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일본을 조선이 도와 전승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전후에 국가안전의 조약과 보상을 얻고자 함이다. 그리고 평등·진보의 상징으로 단발(斷髮)을 감행한다. 한편 손병희의 수제자이자 수청대령(15만 명의 도인 거느림-인용자)인 이용구가 일진회의 실질적 영도자가 되어 13도에 지부를 만들고 관리들의 횡포를 비롯한 불합리한 법률 등의 수정에 이 세력을 이용했고, 러일전쟁 중 일본군을 위해 노동동원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손병희의 처음 의도와는 다른, 친일을 위한 친일 행위로 되어 갔다. 이용구는 송병준과 결탁하여 일진회를 친일세력의 선봉세력으로 만들었다. 결국 한국이 일본보호령으로 되어야 한다는 이용구의 주장 앞에 손병희는 일진회와 결별하고 동학을 천도교라 명한 후 친일세력을 축출한다.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한길사, 1986, 81~146쪽 정리.
으로 인해 학비가 중단되고 귀국한다. 다음 해인 1907년 2월 국비로 다시 도일하여 백산학사, 명치학원 보통부 3학년으로 편입한다. 이 때 호암 문일평 등과 친분을 쌓고, 1908년에는 홍명희의 소개로 최남선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문일평과 홍명희는 이광수보다 네 살 연상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하숙에서 살았으나, 서로 뜻이 통했다. 춘원은 역사와 정치에 대한 감각을 문일평을 통해 키웠고, 홍명희를 통해 바이런, 하목수석(夏目漱石), 러시아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김윤식, 위의 책, 201~211쪽.
최남선과 이광수는 나이로는 두 살 차이(최남선이 연상)이지만 사상이나 행보에서는 최남선이 이광수에 비해 한 세대 정도 앞섰다고 김윤식은 말한다. “육당은 춘원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했지만 언제나 자신보다 한 세대 아래로 간주하였고, 춘원 역시 이 점에는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춘원에게 육당은 마음의 안식처였다.”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2』, 한길사, 472쪽.
또한 최남선을 통해 후일 그의 후원자가 되는 김성수와 송진우를 만나게 된다.
춘원이 김성수를 만난 것도 여기(광문회-인용자)이며, 송진우를 만난 것도 여기였다. 육당이 김성수에게 춘원의 사정을 말하고, 유학비 마련을 부탁했음은 물론이다. 호남재벌의아들인 김성수는 젊고 성실한 인물이며, 와세다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유익한 민족사업에 뜻을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