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춘원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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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친일파-춘원 이광수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독립운동가를 숙청하라고 건의하다
▣일어로 된 단편작 [사랑인가]
▣창씨개명-이광수에서 고야마로
▣생활과 풍속의 원천적인 개조 주장

본문내용

친일파란 우리 나라가 불행했던 시기, 즉 일제 치하로 들어가기 시작한 구한말부터 광복되기까지의 기간 중에서 일본에 동조한 사람들을 말한다. 또한 매국노 역시 친일파라 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작가 이광수를 친일인물로 정하여 그의 생애와 작품에 드러나는 친일행위 및 친일의식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920년 4월, 남쪽지방 상하이의 봄이 무르익어 갈 때 춘원은 이미 두 해째로 접어든 타국생활과 끝이 안 보이는 독립운동에 조바심을 느끼게 된다.
이미 장편소설 {무정}(1917)으로 전조선 여성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명성을 얻은 춘원은 일본 유학중 19세 때 결혼한 아내 백혜순과 이혼한 후, 도쿄여의전을 졸업한 허영숙과 베이징으로 석 달 정도 사랑의 도피여행(1918)을 떠났다. 어려서 천애고아로 자라온 춘원은 애정결핍증 소년이 지닌 민감성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썼는데, 베이징에서 뜻밖에도 단재 신채호를 만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신이 문제아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문제아'의 내용은 "젊은 여자와 함께 산다는 문제, M(매일)신문에 글을 쓴다는 문제, 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문제"였다.

(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말은 춘원이 여행을 떠날 때 총독의 측근인 일인 언론계 거물급인 아베(阿部充家)의 소개장을 소지하고 와서 공사관의 도움을 받은 것을 뜻한다.)

베이징에서 춘원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민족적 분위기를 안은 채 귀국하여 이듬해에 '2·8 독립선언서'를 쓴다. 그리고는 이를 외국으로 보내는 사명을 띠고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 1919년 2월 5일이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속사정은 춘원 같은 천재의 눈으로 볼 때 근대화된 문명국가인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그의 조바심은 연인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에 솔직히 나타난다. "나는 상하이에 온 후로 작년(1919) 9월부터 대단히 자포자기한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술을 먹고 기생집에도 다녔습니다."(편지 일부)

이 무렵 임시정부의 홍보로 {독립신문}을 펴내는 일을 맡았던 춘원은 도산 안창호와 긴밀한 사제적·동지적·육친적 관계를 맺게 되어 일생 동안 그의 이념노선과 충고를 따랐다. 그런데 춘원은 {독립신문} 일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만은 도산의 충고를 거슬렀다. 허영숙이 상하이로 춘원을 찾아간 것은 1921년 2월이었는데, 이 때 그는 아예 상하이에 남는 길, 도산의 권고대로 미국으로 가는 방안 등을 버린 채 그 해 3월 귀국 길에 올랐다.



▣독립운동가를 숙청하라고 건의하다

춘원은 여러 글에서 귀국하면 징역을 살 것처럼 썼으나, 실제로는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을 뿐만 아니라 5월에 허영숙과 정식 결혼, 9월에 사이토(齊藤實) 총독과 면담 등등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