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에 주석하시면서 문무왕 10년(서기 670)에 3층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면을 화엄석경으로 둘렀는데 이로써 화엄사는 대도량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어 나말여초에 화엄사에 주석하셨던 도선국사가 화엄사를 총림으로 키우니 이 때 개창 이래 최대 규모를 가진 대총림이 되었다. 고려시
선종의 영향으로 산지에 위치하게 되고, 이로 인해 대칭의 규범은 깨져서 진입로와 일주문, 그리고 천왕문을 잇는 축은 일직선은 아니며, 누문과 대웅전의 중심축 역시 일직선에 놓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예 범어사, 화엄사, 해인사, 불국사)
Ⅱ. 화엄사의 위치
구례(求禮)지리산 동쪽 기슭에 위치
1) 가람배치
화엄사는 지리산 지맥인 원사봉과 형제봉 사이의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골짜기의 중앙에는 대웅전과 각황전이 자리 잡았고, 각황전 뒷산을 오르면 4사자 3층 석탑과 공양탑이 세워진 언덕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효대라고도 부른다. 대웅전과 삼전 사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북쪽으로 오
화엄 10찰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탄문(坦文, 900~975) 스님과 관련되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음이 탄문의 탑비 명문에 의해 밝혀졌다. 이후 보원사는 화엄종의 성쇠와 궤를 같이 하여 고려 후반 이후로 사세가 기울어져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화엄이라 불리우는 대방광경이다.
한편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화엄경판은 모두 세 가지로서 조선시대 세조가 건립하여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경판과 고려시대 국난극복의 의지를 담아 제작한 고려대장경,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 제작한 화엄석경이다. 화엄석경은 제작 년도가 확실하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