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사림세력을 무능한 정치세력으로 인식
-사화를 무능한 정치세력의 분열과 대립이라는 부정적 측면에서 주목
-영향
▷식민지 상황, 분단과 군사독재의 상황 하에서 민족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회의를 심어줌
▷이후 훈구․사림에 대한 연구가 그 자체에 대한이해보다는 식민사관 극복
사림이 언관직에 대거 등장하면서 성리학적 질서를 보급하기 위한 기반구축 및 실시에 주력했는데, 박창진, 「조선조 기묘사림의 정치적 위상에 관한 연구: 중종 10년(1515)에서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이전까지」 『한국정치학회보 32집 2호』, 1998년, p. 75.
이러한 노력의 중심에 조광조와 더불어 김식
조선왕조가 전기에는 사화, 후기에는 당쟁으로 일관한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역사에서 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론이다. 당쟁론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쟁의 기원은 선조 이전인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戊午士禍)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치는 본래 사사로운 권력의 쟁탈이었다. 정
조선 4대 사화』, 느낌이 있는 책, 17쪽
여기에 김일손은 그에게 좋은 마음만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일손은 이극돈이 정희왕후가 상을 당했을 때에도 기생을 끼고 유람을 하는 등의 문란한 행위와 뇌물을 받는 것을 보고 그냥 넘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극돈의 행적을 사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교재흥에 나섰다. 이전 불교억제책 하에서는 불경을 요서로 인식하여 유생이 마음대로 절에서 불경을 가져가거나 절을 돌아다니며 승려를 구타해도 처벌받지 않았으나 명종때에는 불경을 가져갔다는 이유로 처벌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승려 보우가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