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을 추천했으나, 이극돈은 그가 홍문관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이라면서 후보자 명단에 넣는 것을 반대했다. 김인숙(2009), 『조선 4대 사화』, 느낌이 있는 책, 17쪽
여기에 김일손은 그에게 좋은 마음만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일손은 이극돈이 정희왕후가 상을 당했을 때에도 기생을
일파의
대윤
경원대군(명
종)의 외숙인
윤원형 일파
의 소윤파
세자(인종)의
외숙인 윤임
일파의 대윤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
싼 대립
윤임 일파의
몰락과 연루
된 사림이
죽거나 유배
외척간의 대
립이 정쟁으
로 표면화
<출처 : 김경수(2008), 조선왕조사전 p179>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 문인이라는 이유로 장형(杖刑)을 당하고 평안북도 희천으로 유배된다. 다시 47세에 전라남도 순천시로 유배지를 옮긴다. 이 시기에 평안도 희천에서 정암 조광조에게 도학을 가르쳐서, 조선에서 도학의 정통을 이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후에 51세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사림파의 권력 투쟁이였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1498년 7월) 춘추관에서 성종실록을 펴내기 위한 사국을 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김일손은 이극돈의 기록을 맡았는데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세조때 불경을 외웠던 것과 전라도 관찰사 재임시 정희왕후의 국상에도 관기를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는 것을
중종과 훈구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 ‘기묘사화’가 발생하였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 이때부터 훈구 정치 시대의 말기적 현상인 외척 권신정치시대 공신 세력이 늙어 죽고 사림파의 과도한 개혁 주장에 염증을 느낀 왕이 등을 돌림으로써 정권은 외척 권신들의 손아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