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흥선대원군의 집권
조선왕조의 양반관료체제는 19세기 들어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세도정치 하에서 과거제도는 문란해지고 관리들의 불정부패는 극심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인사행정은 혼란해져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뇌물로 관직을 획득한 지방관의 탐학과 가렴주구로 농민들의
대원군이었다.
Ⅱ. 대원군(흥선대원군) 집정기의 정치세력
그동안 대원군 집정기 동안 안동 김문 및 노론 세력이 축출되었고, 대신 소외받던 인사들에 대해 당파를 초월한 능력 위주의 고른 등용이 이루어졌다든지, 혹은 남인정권 혹은 남인내각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었다. 대원군에 대한 최초의 저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서양문물과 함께 전래된 가톨릭교에 대하여, 처음에 유학자들은 종교생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학문적․사상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서 흥미를 느꼈다. 당시의 학자 중에서 카톨릭교에 흥미를 느끼고 또 그 영향을 받았던 사람은 권철신․일신 형제, 정약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서 개화론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개화사상을 도입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대외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즈음 조선 조정 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자 이러한 국내의 정황을 탐문한 일본은 1875년 통교교섭을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왔으나 교
집권층의 반발을 받았다.
더구나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구군인층 및 도시빈민층의 불만이 폭발한 임오군란과 청의개입으로 인한 내정간섭은 개화파의 입지 및 정치적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 황에서 개화파가 1884년 시도한 정치적 변혁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1884년 겨울 김옥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