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은 조세수취제도도 개선하여 호포법을 실시하였다. 대원군은 군비도 강화하였으며, 비변사를 혁파하고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각지에 포군을 설치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한 준비도 강화하였다. 조선 해안에서의 서양선박의 출현 및 통상요구가 빈번해지면서 국민의 위기의식이 높아지
강화 및 국권 융성을 꾀한 개혁가'라는 평이 엇갈린다.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에 줄기차고 거세게 저항했던 흥선대원군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식민사관의 유산이라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병인박해의 피해를 입은 한국 천주교회, 안동 김씨, 여흥 민씨
조선원정과 1866년 10월 11일부터 11월 21일 까지 강화도를 실제 점령하고 한강을 봉쇄했던 2차 원정이다. 병인양요는 주중국 프랑스 함대 사령관은 로즈 해군소장에 의해 계획되었는데, 이 계획은 1866년 3월 대원군 정권에 의해 자행되었던 9명 프랑스 선교사 살해와 조선교구 신자들에 대한 박해에 대해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 국가라는점 등을 들어 프랑스 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인 로즈의 주재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 해협을 중심으로한 수도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곧 서구 문물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나아가 조선은 이러한 쇄국정책을 기조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게 되었다.
반면 1853년 미국의 해군 제독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