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학회보 (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했다.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고, 한편
흥학보』에 발표한 「문학의 가치」에서부터 이광수는 문학이 일반학문과 구별되는 근대문학의 핵심자질로서 ‘정’을 제시한다. ‘정’이란 “自動自進으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힘이다. ‘정’은 개인으로서의 솔직한 반응을 요구하며, 저마다 능동적인 주체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
흥학보』11호(3월),12호(4월)에 발표한 것으로, 우리말로 쓴 최초의 창작소설이다. 단편 「무정」은 말미에 “此篇은 사실을 부연한 것이니 마땅히 장편이 될 재료로되 학보에 게재키 위하여 경개만 書한 것이니 독자 제씨는 양찰하시얍”이라는 작자의 말이 붙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완의 작품
흥학보》에 발표하였다. 그해 7월에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없는 혼인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오산학교 재직시에는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