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枝詞)에 있어 마지막 흔적을 남긴 풍류객이다. 신교육과 언론을 통해서 민중에게 새로운 지식을 불어넣는 일에 힘썼는데, 갑오개혁 후인 1897년 고향 광주에 ‘시흥학교’를 설립하고 ‘제국신문’을 주재하여 민족 계몽에 힘썼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고 ‘관립한어학교’의 교관을 지냈으며 황성
竹枝詞)’라고 하는 일군의 작품들은 근체 절구로 지어졌다. 또한 ‘고악부’라는 제목과 절구나 율시의 형식을 지닌 것도 있다. 악부시 형식적인 측면에서 고체 악부와 근체 악부로 구분 수 있다.
한시(漢詩)의 시상(詩想) 전개 방식은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네 단계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곧,
함께 멀리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농민의 생활 감정을 노래한 《죽지사(竹枝詞)》를 펴냈으며, 만년에는 백낙천(白樂天)과 교유하면서 시문(詩文)의 도에 정진하였다. 시문집으로 《유몽득문집(劉夢得文集)》(30권) 《외집(外集)》(10권)이 있다.
2. 작가와 관련된 고사성어
竹枝歌)>에 이르는, 민간 가요를 시화(詩化)하는 오랜 전통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소악부> 11수(前 9수, 後 2수)를 지었다. 이는 그의 문집인 《益齋亂藁》 권4에 실려 전한다. 민간 가요를 한시로 옮기는 소악부의 형식과 정신은 이제현에게서 마련되어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급암(及庵) 민사평(閔思平)
竹枝詞·漁父詞·黃鷄詞·길군악·春眠曲·想思別曲·勸酒歌·首陽山歌·處士歌·襄陽歌·梅花歌 등 12노래를 이른다.
이들 노래의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백구가- 致仕한 한 처사가 자연에 돌아가 賞春의 한가한 정을 읊은 노래이다.
죽지사-경치, 인정, 풍속 등을 노래 했으며 일명 乾坤歌라고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