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조의 탕평정치
숙종조 박세채에 의해 황극탕평론이 주창된 이래 탕평은 정치적인 폐단과 모순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안으로 인식되었다. 영조는 당쟁의 피해를 몸소 체험한 군주였기에 그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는 당쟁 타파에 주력하는 가운데 탕평을 자신의 치세를 일
사림정치시대
사림세력의 끊임없는 당쟁은 일제 치하 식민지 시절, 일본의 대 조선 식민통치를 정당화시켜주는 역사적 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당시 식민사관과 일제 어용학자들은 조선은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논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조선 당쟁의
탕평정치를 내세우고 국정운영의 능동적 주체로서 성왕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당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 정조는 붕당들이 권력투쟁의 전위조직으로 전락했다고 보았고, ‘공론을 형성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잘 다스리도록 돕는다’는 붕당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각 당
당쟁론(黨爭論)’의 관점으로 설명되었다. 하지만 당쟁론을 비판하면서 ‘붕당정치론(朋黨政治論)’이 제기되면서 당쟁론은 그 힘을 잃었다. 현재 조선중기 정치사에 대한 최근의 이해경향은 ‘붕당정치론’의 구도에 대한 비판과 보강이 함께 논의되면서 단순한 부정․긍정의 인식차원을 넘어 각
당쟁의 시작
예송 논쟁의 중요성
-문치주의 국가에서 정쟁은 이론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왕의 상복은 정통성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
1) 발단 : 효종의 승하, 대비 조씨의 복제 문제(1년 VS 3년) ➡ 효종의 정통성 문제
박세채의 탕평론 : 당 불문, 현명한 인재 등용 주장
숙종 : 탕평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