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국교정상화협상(북한일본국교정상화)의 추진배경
유럽에서의 냉전종식 움직임이 활발하던 1988년 7월의 ‘7․7선언’ 이후 시작된 한국의 북방정책은 한반도에서의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시켰으며, 일본의 대북한 관계개선에 대한 한국정부의 압력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미
원한 것이었다. 제네바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던 사실은 미국으로 하여금 양자회담 효용에 관해 의문을 갖게 하였다. 더욱이 미측에 핵개발을 시인하고는 국제사회에 대해서 이를 부정하는 북한의 태도는 양자보다 다자대화가 필요하다는 미국의 인식을 심화시켰다
※ 한․일 회담전의 일본의 국내적 상황
87년 11월에 다케시타 수상이 취임하게 된다. 한․일 협력관계의 지속을 강조하는 속에서 이듬해인 88년에 리쿠르트 뇌물 사건을 계기로 그에 대한 책임으로 89년 6월 사임하게 되면서 우노가 수상에 취임한다. 그러나 섹스 스캔들로 7월에 실시한 참의원 선
북·일관계는 대체로 제5차원의 ‘동서대립’에 의한 긴장 또는 데탕트, 제2차원의 한국의 대북한정책 및 남북관계, 한·일관계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접근과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제5차원의 동서냉전구조에 의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국교정상화를 위한 관계개선까지 발전하지 못하였다.
협상은 미국의 대북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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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북일국교정상화협상(북한일본국교정상화)과 일본정치
1992년 11월에 수교교섭이 중단된 이후 북일간의 접촉은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측의 움직임으로부터 다시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