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은 일어나게 되고, 그 때문에 당현종은 이전 ‘개원의 치’의 태평성세를 이룬 성군이기보다는 여색에 빠져 정치를 등한시했던 황제로 우리들의 기억에 남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당 전기 평화는 안․사의 난을 계기로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보통 안․사의 난이라는 것은 안록산과 사사명이 일
안록산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현종은 친위군에게 출진 준비를 명하긴 하였으나 안록산의 반란군과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밤이 새자 현종은 연추문을 열어젖히고 양귀비와 그의 자매, 황족, 측근,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무장한 천명의 친위군이 이들을 호위하여 서남쪽 촉 땅
안록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양귀비는 안록산의 이러한 성격에 매료되어 그를 가까이 대하였다. 그리고 이 둘의 추문이 널리 세상에 퍼졌건만 현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때 명문귀족 출신인 재상 이림보는 정치에 싫증이 난 현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당대 최고의 권신으로 군림하고 있
안록산의 난(755-763)에 관여하여 형벌을 받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다시 유랑의 길에 올라, 마침내 762년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시선」이라 불리는 이백은 생애를 거의 방랑길에서 보냈으며, 주로 낭만적인 성향의 시를 1천 수 이상 남겼다. 그의 시는 대개 시풍이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
권력다툼 끝에 반란을 일으켜 한달 만에 낙양을 반년만에 장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연 연호를 성무라 했으나 지방적 차원의 저항과 위그르의 당군 원조, 반란군 내부 분열로 반란은 종식되었다. 안사의 난이 가져온 영향력을 매우 컸는데 그 중 번진은 京兆部와 河南部를 제외한 전역에 설치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