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다툼 끝에 반란을 일으켜 한달 만에 낙양을 반년만에 장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연 연호를 성무라 했으나 지방적 차원의 저항과 위그르의 당군 원조, 반란군 내부 분열로 반란은 종식되었다. 안사의 난이 가져온 영향력을 매우 컸는데 그 중 번진은 京兆部와 河南部를 제외한 전역에 설치되
번진이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내지에서도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난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여 지방세력화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당왕조의 지방통치에 있어 내지번진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도독부와 주의 관계를 통해 당 전기의 지방행정제도를, 그리고
당송간의 변혁은 인정하되 당말까지가 고대이고 송 이후는 중세라는 견해를 제시하여 대립된 두 견해가 거의 평행선을 이루어 온 대에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이후 양자의 설을 계승하여 지지하는 두 학파, 이른바 京都學派와 東京學派사이에 중국사의 시대구분과 관련하여 이 변혁기를 어디에 위
당시의 범양(范陽)·성덕(成德)·천웅(天雄) 등 소위 허베이삼진[河北三鎭]은 항상 자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종종 반란을 일으켜 중앙정부를 위협하였다. 9세기 초에 당나라 헌종(憲宗)이 번진억압책에 성공하여, 중앙으로부터 절도사를 파견하고 외진군을 절도사관할에서 분리시킴으로써 당은 안정기
관청을 설치해 그 지역에서 일정한 토지를 보유한 농민들을 징집하여 지역 방위와 변경 방위를 맡게 하는 군제가 부병제이다.
이 제도들이 성립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잘 정비된 지방제도와 호적이었다.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 이 세 제도는 기본적으로 농민을 일정한 지역에 정착시킨 상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