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을 일으킨 건주여진은 1467년(세조 13)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정벌을 당해, 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가 살해되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힘이 만주에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조선 선조가 의주(義州)에 피란하였을 때 건주 여진
나라 때 중국을 다녀온 기록은 빈왕록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명나라 때 중국을 다녀온 기록은 조천록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 많고, 청나라 때 중국을 다녀온 것은 연행록이라 이름 붙인 것이 많다.
조천록은 고려와 명(1368~1392), 조선과 명(1392~1636)의 전형적인 조공 관계가 만들어 낸 기록문학이며, 연
③ 광해군의 중립외교
명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후금은 명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명나라는 큰 병력을 풀어서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의 감정
청원서를 내면 이를 허용해주는 방식으로 두만강 대안지역의 이주를 지원했다. 압록강 쪽의 강제군수도 서간도 일대의 땅을 28개면으로 분할 해 통치했다. 1903년(광무 7년) 간도 관리사 이범윤이 간도지역(북간도지역)의 조선인을 보호하기위해 파견되었고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은 청나라에게 세금을
조선은 1866년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대원군이 무기 개발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 결과, 조선정부는 무기를 생산하거나 기존의 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투자를 하고, 외국의 기술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의 이러한 변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