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이러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왜란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조선으로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④ 인조반정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이었지만 성리학에 의한 이념을
조선에 대해 강화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간다. 조선왕조의 명분이 추락한 것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명분론이 팽배하던 분위기 속에서 결국,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에 의해 북벌론이 대두
조선 왕실은 강화도로 피난
후금에서 ‘형제관계’를 요구하고 조선 왕실이
몇몇 조건을 내걸며 이를 수용하면서 종결(정묘조약)
김상헌은 막무가내 척화론자가 아님
- 1627년 정묘호란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함
고려시대 서희의 외교적 노력과 비교
- 최명길의 주장은 화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633년) 인조 11년 2월 2일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조의 이러한 행위는 말로만 표현했을 뿐, 실제 행동으로 후금에 대한 보복행위를 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인조는 존명사대를 계속 유지하였다. 즉 최고 통수권자인 국왕이 무조건 명나라와의 외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