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반정을 일으킨다. 이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숭명배금의 외교정책을 펼친다. 한편 반정공신 중 한명인 이괄은 반정 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데(이괄의 난), 반란이 실패 한 후 청으로 도주해서 광해군이 억울하게 폐위되었다고 주장하여 청은 정묘호란의 명분을 가지게 된다.
청은 조선에 대해 강화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간다. 조선왕조의 명분이 추락한 것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명분론이 팽배하던 분위기 속에서 결국,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에 의해 북벌론이
. 다음은 병자호란 직전 인조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료를 인용하겠다. 이때 인조는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자신들과 군신 관계를 맺자는 제의를 물리치면서 다음과 같은 교서를 반포하였다.
우리 나라가 갑자기 호란을 당하여 임시로 저들의 요구를 허락했으나, 오랑캐의 욕구는 한이 없어서
앞에서 살펴본 조선의 국방태세와 방어실태에서 임진왜란의 초기에는 조선의 참패만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전쟁 준비가 거의 없는 가운데 일방적인 침략을 당한 조선의 전란 피해는 더욱 컸다.
2) 일 본
임진왜란이 일어날 시기 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전국통일이 이뤄낸 상
청의 압력에 즉시 무력으로 응징하자고 주장.
청과는 사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파.
대의명분을 강조한 성리학자.
척화론의 주장.
1. 명과의 2백 년 넘게 쌓아온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
2. 임진왜란 때, 도와주었던 명나라와의 의를 버릴 수 없다.
3. 화친을 하더라도, 먼저 싸우고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