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독자성 유지를 위협하는 것으로써 양국간의 대립은 점차 심각해져 갔다.
(2) 모순의 심화와 여수전쟁의 발발
581년 수가 건국되자, 고구려는 즉각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했다. 수와 우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수의 등장에 따른 국제정세를 주시하며 그 대비책을 모색하려던 것 같다.
전쟁에 있어 국가의 책임을 지워버린다. 윤건차(2000), 「기억과 사회과학적 인식 - 재일동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진보평론 5》, pp.32~33.
교과서 속에 민족의 위기에 맞선 빛나는 승리로 가장 강조되어 있는 것은 고구려의 수, 당과의 전쟁이다. 교과서의 수와 당나라는 고구려의 숙적이나 살
전쟁을 치른 것을 고려해볼 때 전란의 혼란속에서 많은 불교조각들이 파괴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미뤄 짐작이 간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372년. 즉 4세기말경부터는 중국에서 불상들이 전래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상들이 고구려 불상의 모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5세기경에
5세기 가야지역의 유적 상황이 4세기 이전에 비하여 상당한 변화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김해를 중심으로 한 경남 해안지대에서는 패총 및 대형 목곽분 등이 다량 출토되었으나, 5세기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고분유적의 수효가 줄어들고 규모도 소형 석곽분 정도로 위축되게 된다. 이러한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