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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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학]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수와외 관계
(1) 국제질서의 재편성
(2) 모순의 심화와 여수전쟁의 발발
3. 당과의 관계
(1) 당나라의 건립 및 고구려의 초기 대응
(2) 여당전쟁과 고구려의 멸망
4. 맺음말


본문내용
고구려와 수당의 관계

학 과 : 사학과
성 명 : 최진영
학 번 : 4454509




1. 머리말
2. 수와외 관계
(1) 국제질서의 재편성
(2) 모순의 심화와 여수전쟁의 발발
3. 당과의 관계
(1) 당나라의 건립 및 고구려의 초기 대응
(2) 여당전쟁과 고구려의 멸망
4. 맺음말







1. 머리말
고구려는 초기의 성장과정에서부터 동북아시아의 패자적 위치에 오르기 까지 주변 여러 민족과 투쟁 및 타협을 통해서 그 독자성을 견지해 왔다. 고구려는 장시기 동안 중국 역대 중앙 또는 지방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한왕조 이후 중국은 심각한 혼란기에 들어감으로서, 고구려는 자국의 역량을 강화하고 동북아시아 세력의 한 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6세기 중반까지의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 북방의 유연과 돌궐, 신라, 백제등과 다원적인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동북아시아에서의 자국 중심의 독자성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6세기말에 접어들면서 내외정세가 급변하여 이에 대한 고구려의 대처방안도 새롭게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에서는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통일한 수가 등장하였고, 나제동맹은 더욱 굳어져 더 이상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은 한계에 이르렀다. 내부적으로는 귀족간의 권력투쟁 속에 무력을 앞세운 연개소문이 정권을 찬탈함으로서, 국가정책이 효율적으로 수행되기 어려운 상태에 처하였다.
본고는 중국통일왕조인 수당의 등장으로 인한 그 영향과 고구려의 수당항쟁을 더듬어 봄으로써, 고구려와 수당의 역사적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수와의 관계
575년, 북주가 북제를 정복함으로써 북중국이 통일되었으나, 581년에 양견이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장안에서 수의 문제로 즉위하였다. 수문제는 곧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을 강화시켜 대외팽창을 도모하였다. 589년에는 마침내 남조 진을 정복하여 중원을 통일하였다. 이와 함께 이제까지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급속히 변동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581년에 수가 건국되자마자 수에 사신을 파견하고 외교관계를 맺었다. 신라는 594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수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대신라 공세가 강화되면서 611년에 고구려 정벌을 청하는 걸사표를 수에 보내는 등 수와의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와 같이 수의 등장과 중국의 통일, 그리고 수에 의한 돌궐의 복속은 5세기 이래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것이었다.

(1) 국제질서의 재편성
이전 남북조시대의 국제관계를 살펴보면 몇 가지 특이한 현상적 특징이 나타난다. 5~6세기 국제사회를 주도하였던 국가들은 상쟁과 연횡을 되풀이 하였으며, 국제관계속의 연동을 띠고 있다. 즉 어느 한 나라의 움직임에 의한 파급효과가 다른 국가들의 연쇄적인 반응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간의 교류형태는 힘에 의한 상하관계가 아닌 실질적 득실에 의한 조공, 책봉관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공, 책봉관계는 명목상으로는 양자간의 상하관계를 규정한 것이었으나, 실제 국제관계를 움직여 나가는데 있어서는 그것의 표면상 논리가 구현되지 못하였다. 또한, 국제질서에 있어 세력균형과 상하관계의 양 측면이 현상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전자는 다수의 국가들 간의 병존형태와, 일국 위주의 지배적인 국가관계를 부정한다면, 후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로 여길 수 있다.
오호십육국, 남북조시대라는 극진한 혼란기를 걸쳐 통일된 수나라는 강압적 패권주의를 통해 기존의 국제외교적 균형상태를, 수 중심의 국제질서로 재편성하려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독자성 유지를 위협하는 것으로써 양국간의 대립은 점차 심각해져 갔다.

(2) 모순의 심화와 여수전쟁의 발발
581년 수가 건국되자, 고구려는 즉각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했다. 수와 우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수의 등장에 따른 국제정세를 주시하며 그 대비책을 모색하려던 것 같다. 그러나 589년 수가 진(陳)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는 수의 통일이 미칠 국제적 파장을 염려하여, 장안성을 쌓는 등 향후 있을지 모를 수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 중국 측 기록인 에는 고구려가 몰래 수에 사람을 잠입시켜 무기 제조를 매수하였으며, 기병을 동원하여 수의 변인을 살해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점차적으로 고구려와 수의 관계가 상호 불신의 단계를 지나 적대적 대립의식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영양왕 9년에 고구려는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함 으로서, 수에 대한 정면 대결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곧 이어 수의 1차 침입이 있었다. 문제에 이어 등극한 수 양제는 강압적 패권주의를 통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수 아래 재편성하려는 야욕을 더욱 드러낸다. 그러던 중 607년 수에 복속된 동돌궐을 순시하던 양제는 우연히 고구려 사신과 마주치게 되고, 양제가 고구려왕의 입조(入朝)를 강요한다. 이 일을 계기로 수 양제는 더욱 고구려 공격에 박차를 가한다.
이렇듯 수와 고구려가 극단적인 대립상태로 치닫게 된 요인을 살펴보면, 먼저 수의 강압적 패권주의를 들 수 있다. 진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이후, 수나라는 기존의 세력균등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수 아래의 상하관계로 재편성하려는 의욕을 드러냈고, 서의 토욕혼, 북의 돌궐 등을 잇따라 복속 시킨다. 수의 군사적 위협아래 고구려는 그 독자성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전쟁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고구려의 대내적인 요인으로, 당시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가의 독점적 집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연개소문가는 연개소문가 그 조부 때부터 집권을 독점하는 동안, 수당의 침입을 수차례 물리침으로서 고구려의 독자성을 견지하려는 직선적 자주파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개소문가의 장기간에 걸친 독점적인 집권은 국가내외의 정책방향을 폭 넓게 논의, 결정할 없는 경직된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것이고, 이는 수와의 대외정책 방향이 곧바로 전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3. 당과의 관계
618년 수에 이어 동아시아 대륙의 통일국가인 당 왕조가 출현하였다. 당나라가 출현함에 따라, 주변 여러 국가와 민족은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잇달아 당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한반도 북단의 고구려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는 많은 문제에서 이해가 엇갈리고 있었다. 이는 당나라가 한나라 이래 건립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천하질서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고, 동아시아를 주축으로 한 패권을 형성하려고 하는데 표현되었다. 이외에도 당나라는 요동의 토지와 수나라 말기의 전쟁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는 그 후 당나라와 고구려의 충돌에 복선을 깔아주었다.

(1) 당나라의 건립 및 고구려의 초기 대응
당이 성립된 초기, 고구려와의 대당관계는 표면상 이전의 대수관계와 유사했으나 그 내면은 판이했다. 수나라는 대내적 안정을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수 중심의 국제질서를 확립하려다가 멸망하였다. 이어 518년에 건국된 당은, 성립 초기 주변민족을 복속시켜 가면서, 한편으로 민심수습을 위해 고구려와는 전쟁보다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고구려 역시 당나라에 대하여 잘 몰랐기에 사절을 파견하여 새로운 왕조의 동향과 고구려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려고 했다. 영류왕2년(619) 이후 보장왕 원년(642)까지 매년 당에 1회 정도의 사신을 파견하며 교섭을 지속하였다. 물론 이 기간에 이루어진 평화섭인 교섭은 정책적인 목적성을 띠고 있다. 당에서는 고구려에 대해 평화공세를 취하는 동시에 은근히 압박하면서 당 자체의 민심을 수습코자 하는 이중의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고구려 역시 수나라와의 수년간에 걸친 전쟁 때문에 입은 직, 간접의 손실을 복구하려 하였다.

(2) 여당전쟁과 대당관계의 특징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패권주의의 지향은 이전 수와 다를 바 없었으며, 초기의 평화적 관계는, 당 내부의 국정 안정이라는 필요적 차원에서 단기간 나타난 현상이었을 뿐이었다. 628년에 당은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지형을 조사했던 점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당에서 전략, 전술에 이용할 목적으로 지도를 요청한 것이라 여겨진다. 671년(영류왕14년)에는 당은 고구려의 수의 침략을 물리치고 세운 기념탑인 경관(京觀)을 헐어버리게 했다. 이같이 당의 평화를 가장한 기미정책 속에, 고구려도 당의 침략을 염려하여 인구조사와 함께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훼손되었던 요동지방의 성벽을 재축조하는 등 그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642년 연개소문의 정권 찬탈은 고구려의 연소문가에 의한 독점적 체제와 그에 따른 정책결정의 경직성을 더욱 뚜렷이 하였고, 당과 백제도 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신라는 나제연합을 파기한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당과의 교섭을 통해 상황을 타개하려 하였다. 당은 이에 부응하여,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권고하지만, 고구려는 역사상의 영토 문제라는 이유로 당나라의 권고 조치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에 당은 요동의 역사귀속문제를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고구려가 당나라가 파견한 사신을 잡아 가둔 것은 당나라가 전쟁이라는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후 642년 이래로 고구려와 당나라는 어떠한 왕래 기록도 보이지 않고, 양국이 서로 상대방의 사신을 위협하고 벌할 만큼 대립이 날카로워지면서 외교적 타협은 결렬되어 갔다. 이에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3년)에 고구려 침략의 뜻을 굳히고 대 고구려 원정명령을 내린다.
이상에서 보듯, 중국왕조의 패권주의를 통한 국제질서의 재정리와 고구려의 독자성 유지라는 이해관계가 대치가 전쟁이란 극단적 상황으로 간 형태는 수대의 상황이 그대로 재답습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비록 대외강경파로 알려졌지만, 그도 부분적으로 대당전쟁만은 피해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영류왕 7년에 고구려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책봉 받음과 동시에 당은
참고문헌

•이병도, 「수,당과의 전쟁」『한국사5 삼국의 정치와 문화-고구려편』, 국사편찬위원회, 1997
•노태돈, 「5~6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관계」,『고구려사 연구』, 1999
•정병준, 「고구려와 수외 관계」,『고구려 국제관계 논문집』, 고구려연구회, 1994
•금경숙. 「격동의 50년 고구려와 당 관계 연구」, 『고구려 국제관계 논문집』, 고구려연구회,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