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 속의 민족주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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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교육 속의 민족주의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실태
1. 국가의 형성을 통한 ‘민족’ 만들기
2. 민족과 국가의 정통성 계승을 위한 서술
3. 우리 민족 중심의 대외관계와 전쟁에 대한 서술
1) 대외관계에 나타난 자국 중심 서술
2) 전쟁에 관한 기술
4. 일제시기 서술에 나타난 민족주의
Ⅲ. 원인
1. 역사적·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민족주의
2. 역사 교과서의 변천 과정에서 비롯된 민족주의
Ⅳ. 해결방안
1. 보편적 가치와 인류적 양심에 기초한 교육 실천
2. 문화를 통한 공감대의 확대
3. 역사과 교육과정의 개편 논의
Ⅴ. 맺음말
본문내용
3. 우리 민족 중심의 대외관계와 전쟁에 대한 서술
1) 대외관계에 나타난 자국 중심 서술
민족을 주체로 서술하는 역사 교과서에서는 주변 민족에 대한 이해 역시 ‘우리 민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정체성’이 타자와 자신을 비교하며 형성되는 것이라 할 때, ‘민족의 정체성’도 주변 ‘민족’과의 ‘상대적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고로 전근대 시기 대외관계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 이루어질 때 세계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우리 ‘민족’의 우월한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해 실제 사실을 ‘우리 민족’에 유리한 부분은 과장하고, 불리한 모습은 축소하거나 생략하고 있다.
우리는 백제가 그 전성기인 4세기에 중국에 진출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4세기의 중국 요동, 요서 지역에는 백제의 진출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여호규(2002),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그리고 5세기 이후 백제는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왕은 중국의 남조 국가들로부터 ‘진동대장군’, ‘영동대장군’, ‘수동장군’ 등으로 책봉되어 중국적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녕왕 21년.
교과서에서는 이를 은폐하고 백제가 마치 당시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대등한 외교관계 혹은 우월한 국제적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오해를 유도하고 있다.
고대의 대외관계에서 특히 강조되는 부분은 일본과의 대외관계이다.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사회과탐구] 6-1의 서술에서는 고대문화의 일본 전파에 대해서 특별히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라는 단원으로 독립시켜 강조하여 기술하고 있다. 일본의 고대 문화는 삼국의 많은 학자와 승려, 기술자가 영향을 미쳤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일본의 고대문화가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를 국제 문화 교류 측면에서 중국과 한반도, 일본 3국간의 상호 교류와 전파의 관점에서 보기 보다는 문화적으로 낙후된 일본을 선진적인 ‘우리 민족’이 도와주었다는 방식의 기술이 압도적이다.
게다가 주변 민족에 대한 의도적인 낮추기도 교과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여진족이 일찍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일컬었음을 강조한 교과서의 지문은 우리민족과 여진족이 지배-복속 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반대로 1126년에 고려와 금이 조공과 책봉을 교환하게 되었음은 기술하지 않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조선이 건국 이후 명을 외교적으로 섬기면서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했으며, 명이 조선에 대해 정치, 문화적으로 ‘대국’으로 군림했던 사실은 기술하지 않고 있다.

2) 전쟁에 관한 기술
교과서의 민족주의적 서술에 있어 두드러지는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전쟁과 같은 집단적 폭력에 대한 기술이다. 민족주의의 ‘역사’는 전쟁을 다양하게 체험한 개인의 구체적인 삶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그들 개개인의 복수적 역사를 ‘국민’ 일반으로 추상화한 ‘역사’이다. 개인의 구체적인 피해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국민’ 일반에 대한 책임 또는 애국심을 강조하는 역사의 서술은 전쟁에 있어 국가의 책임을 지워버린다. 윤건차(2000), 「기억과 사회과학적 인식 - 재일동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진보평론 5》, pp.32~33.

교과서 속에 민족의 위기에 맞선 빛나는 승리로 가장 강조되어 있는 것은 고구려의 수, 당과의 전쟁이다. 교과서의 수와 당나라는 고구려의 숙적이나 살수대첩, 안시성 싸움의 패배자로만 그려져 있다. 물론 수․당나라와 고구려 지배층사이의 충돌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나 그들 간에 있었던 수많은 종교적, 문화적 교류를 교과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교과서에서는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 전쟁의 승리자 을지문덕 등은 우리 민족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구한 한국사의 영웅으로 만들면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묵묵히 참선과 착한 일을 행하는 법을 가르쳤던 백제의 현광 동국대학교 출판부(1984), 《불교문화사》, pp154~155.
과 같은 평화로운 민중 승려는 잘 언급하지
참고문헌
이성시(2001). pp. 83~108.
윤건차(2000). 「기억과 사회과학적 인식 - 재일동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진보평론 5》
동국대학교 출판부(1984). 《불교문화사》.
도면희. 「한국근대사 서술에서의 민족․국가 문제」. 《역사비평》. 제58호(역사비평사. 2002년 2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녕왕 21년.
윤해동. 「한국 민족주의의 근대성 비판」. 《역사문제연구》. 제4호(역사문제연구소. 2000년 4월).
한준상․정미숙. 「1948~1953년 문교정책의 이념과 특성」. (『해방전후사의 인식 4』. 1989년 4월).
이한구. 「닫힌 민족주의에서 열린 민족주의로」. 《철학과 현실》. 제67권(철학문화연구소. 2005년 12월)
박중현. 「역사교육에서의 한일관계와 민족주의」. 《역사교육》. 제95집(역사교육연구회. 2005년 9월).
지수걸. 「제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준거안’의 문제점」. 《역사교육》. 79. 2001.
서중석. 「한국 교과서의 문제와 전망-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제116권(韓國史硏究會. 2002년 3월).
양호환.「교육과정에서 역사과의 위상에 대한 논의의 허실」. 《역사교육》. 제 79호(역사교육연구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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